헌법재판소의 기다림은 이제 신중함과 수긍의 상징이 되고 존재의 가치를 부각시킨 반면에, 대법원의 조급함은 사법 내란의 의심을 받기에 충분하며 조직 개편의 명분이 생기게 되었. 대법원의 권위를 스스로 무너뜨린 것이다.
대법원은 그 누구보다 ‘신중함’으로 말해야 하는 기관이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사법부가 스스로 그 원칙을 걷어찼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통령 후보의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을 둘러싼 대법원의 졸속 선고를 두고, 정치권뿐 아니라 법원 내부에서도 "이건 전례가 없다"는 탄식이 터져나오고 있다.
선고까지 불과 34일, 전원합의체 회부 후 9일 만에 내린 결정이다. 1심과 2심이 엇갈린 판결을 내린 민감한 사건, 그것도 대선이라는 국가적 이벤트를 불과 한 달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나온 속전속결이었다. 명분은 '혼란 해소와 사법 신뢰 회복'이었다. 그러나 정작 돌아온 건 정반대였다. “선거 개입”이란 정치적 비판, 그리고 “듣도 보도 못한 진행 속도”라는 사법부 내부의 우려다.
대법, 스스로 만든 신뢰의 공백
서울고법이 지난해 2심에서 무죄를 선고했을 때만 해도, 다수 법조계 인사들은 “법리를 세밀하게 다듬은 판결”이라 평했다. 실제로 공직선거법 위반의 기준을 둘러싸고 법원은 수년째 모호한 잣대를 유지해왔다. 그런 가운데 이 대표 사건은 대법이 판례 기준을 정립할 기회로 여겨지기도 했다.
하지만 대법은 이 기회를 허무하게 던져버렸다. 조희대 대법원장은 사건이 2부에 배당된 지 단 2시간 만에 전원합의체 회부를 결정했다. 그마저도 결론은 일사천리였다. 반대 의견을 낸 이흥구, 오경미 대법관은 "충분한 설득의 시간이 없었다"고 공식 판결문에 적시했다. 대법원 스스로 ‘절차의 공정성’조차 보장하지 못했음을 자인한 셈이다.
내부 비판도 거세다. 현직 판사들은 실명으로 내부망에 글을 올리며 "30년 법관 생활 중 이렇게 빠른 전합 판결은 처음"이라고 했다. 이는 단순한 절차적 우려가 아니라, 사법부의 정치적 중립성과 독립성에 대한 총체적 회의다.
국민 2만 명 “알 권리 있다”...정보공개 요구 폭주
국민들의 반응도 심상치 않다. 사건번호 ‘2025도4697’로 접수된 이재명 대표의 대법 판결과 관련해 5월 4일 오후 4시 기준으로 무려 2만1000건이 넘는 정보공개청구가 접수됐다. 대법관들의 기록 열람 일시, 판결문 작성 과정, 회부 결정 경위까지 상세한 자료를 요구하는 청구가 이어지고 있다.
5월 3일 시작된 '조희대 대법원장 사법농단 규탄 100만인 서명운동'이 단 이틀만에 100만명의 서명을 돌파했다. 대법원에 대한 국민적 불신과 분노의 결과다.
법조계 인사들조차 “이 판결은 정치적 후폭풍을 고려하지 않은 채 내린 무리수였다”는 평가를 내놓고 있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은 "선거에 영향을 미칠 것이 명백한 시점에서의 졸속 선고는 사법부에 대한 근본적 불신으로 이어질 것"이라며 강도 높게 비판했다.
법원이 정치를 따라갔을 때 한국의 사법부는 정치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왔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이번 사태는 그 거리가 사실상 사라졌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무엇보다 ‘유죄냐 무죄냐’보다 심각한 건 그 결론에 이르는 과정의 신뢰 훼손이다.
정치는 유불리에 따라 판단을 바꿀 수 있다. 그러나 사법은 그러면 안 된다. 사법부가 무너지면, 그 공백은 곧장 정치가 메우게 된다. 대법원은 이번 사건을 통해 정치가 아닌, 국민의 눈을 가장 먼저 의식했어야 했다.
이번 사태는 단지 이재명 한 사람의 유무죄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한국 사법의 독립성, 그리고 다음 정권과 그 이후를 포함한 정치 지형 전체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신호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