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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분석] 노동운동의 ‘전설’에서 아스팔트 우파까지…김문수, 보수 대선후보가 되기까지

양 극단을 모두 지나온 정치인의 ‘전복적 궤적’
김문수(74세). 
그 이름 앞에는 너무나 상반된 수식어들이 붙는다. 
노동운동 1세대, 민청학련 구속자, 서울대 제적생. 동시에 그는 신한국당 3선 의원, 재선 경기지사, 그리고 전광훈 목사와 함께 기독자유통일당을 창당한 '아스팔트 보수'다. 
그리고 이제 그는 국민의힘의 2025년 대선 후보가 되었다.

그의 인생은 단순히 정치인의 성공기나 이념적 전향 이야기로 포괄하기엔 벅찰 정도로 한국 정치사의 '격동' 그 자체다.

 청계천에서 시작된 ‘노동운동의 전설’

김문수는 1970년 서울대 상과대학에 입학했지만, 이듬해 유신반대 시위로 제적, 1974년에는 민청학련 사건으로 또다시 퇴학당한다. 
그렇게 대학을 졸업하기까지 무려 24년이 걸렸다.

그는 이후 청계천 피복공장에서 재단보조공으로 일하고, 한일도루코 노조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위장취업 운동의 시초로 불릴 만큼 실천적 노동운동가로 자리 잡았다. 
1980년, 1986년 각각의 구속은 그가 정권에 맞섰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그 시절의 김문수를 기억하는 이들은 그를 이렇게 부른다. 
“전설.” 심상정 정의당 전 대표의 회고처럼, 그는 진보운동권이 필사해서 돌려보던 연설문의 주인공이었다.


정치권 진입, 그리고 급격한 전환

그러나 1990년대, 소련 붕괴와 함께 세계사회주의의 몰락은 김문수에게도 큰 전환점을 가져왔다. 
1994년, 김영삼 당시 대통령의 권유로 여당인 민주자유당에 입당, 이후 경기 부천 소사에서 3선 의원, 경기도지사까지 올라가며 보수 진영의 중견 정치인으로 자리 잡는다.

이 시절은 김문수의 정치적 실용기다. 수도권 대중교통 개편, GTX 구상, 통합요금제 등 굵직한 행정 성과도 있었지만, 동시에 ‘관등성명 요구 논란’과 같은 권위주의적 리더십으로 대중적 호불호도 갈렸다.


탄핵 이후 ‘극우와의 만남’…야인에서 다시 대선 후보로

2016년 총선 패배 이후, 김문수는 당내 존재감을 잃은 야인이 된다. 이후 그는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반대를 외치며 '태극기 집회'의 전면에 섰고, 문재인 정부를 “총살감”이라 표현해 거센 비판을 받기도 했다.

2019년, 전광훈 목사와 함께 창당한 기독자유통일당은 이념적 극단에 한 발 더 다가선 상징이었다. 이 무렵부터 ‘아스팔트 보수’라는 별칭이 따라붙기 시작했다.

그랬던 그가 윤석열 정부의 고용노동부 장관으로 복귀하고, ‘12·3 계엄’ 정국에서 유일하게 사과를 거부하며 정치적 재조명을 받았다. 이는 김문수가 단순히 보수 진영의 한 축이 아니라, 보수 내부 권력 구도의 분기점에 선 인물로 다시 떠오른 배경이다.


대선후보 김문수, 시대정신과 어떻게 호응할까

이번 대선 경선에서 김문수가 보여준 당심 장악력은 뚜렷하다. 
‘반탄핵’이라는 구호는 보수당원 사이에서 정서적 정통성의 복원으로 작용했다. 
동시에, 그는 한덕수 전 총리와의 단일화 가능성을 열어두며 중도보수와의 연대 가능성도 보여줬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치 않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여론조사에서 여전히 우위에 있고, 김문수 후보의 강경 보수 성향이 본선에서 외연 확장에 도움이 될지는 불확실하다.

김문수의 정치사는 이념적 모순과 시대적 전환을 몸소 겪은 한국 정치의 축소판이다. 
그는 좌파에서 우파로, 체제 비판에서 체제 수호로, 급진에서 보수의 중심으로 끊임없이 자리를 옮겨왔다.

그의 대선 도전은 이 질문을 다시 우리 앞에 던진다.
“시대정신은 여전히 전설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그 전설의 현재형을 의심할 것인가.”

그 답은 이제 유권자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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