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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와 담벼락 사이, 은행나무 한 그루가 던진 질문

2026-09-13 12:05 | 입력 : 마포저널

서울환경연합·한국예술인복지재단 ‘관계를 소환하라!’…“나무를 둘러싼 관계를 들여다보다”

도로와 담벼락 사이에 은행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특별히 아름다운 공원에 자리한 나무도 아니다. 가파른 골목길 옆, 도로와 환기미술관 담벼락의 경계에 있다. 도로 끝에는 가정집 대문이 있고, 미술관 담벼락에는 금이 간 틈도 보인다. 가정집 앞까지는 콘크리트, 그 아래는 아스팔트가 나무와 맞닿아 있다. 심지어 이 도로는 소유자가 49명으로 지금까지 밝혀져 있다.

지난 12일, 이 은행나무를 만나기 위해 시민들이 부암동에 모였다.

서울환경연합과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이 주최·주관한 시민참여형 관계망 퍼포먼스 워크숍 ‘관계를 소환하라!’의 첫 번째 프로그램이다. 이날 주제는 ‘도시 나무를 둘러싼 행위자들’이었다.
프로그램은 도시의 나무를 하나의 독립된 생명체가 아니라 사람의 돌봄과 기술, 행정과 제도, 장소의 기억, 토양과 미생물 등 수많은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로 바라본다.
참가자들은 관객이 아니라 ‘조사자이자 기록자’가 되어 한 그루의 나무를 둘러싼 관계를 직접 찾아 나섰다.

그런데 현장에서 나무를 바라보며 오히려 다른 질문이 생겼다.
그냥 도로와 담벼락 사이에 있는 나무 한 그루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이 나무에 이렇게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일까.

“이 나무가 우리보다 먼저 살았을 수도 있다”
현장에서 환경 전문가 최진우 박사는 나무가 정확히 언제 이곳에 뿌리를 내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은행나무의 크기로 예상해보면 수령은 100년을 넘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적어도 환기미술관(1992년 11월 5일 개관)보다는 오래됐을 가능성이 크다.
이 생각이 현장에서 묘하게 다가왔다.
사람들은 건물을 짓고 담장을 세우고 도로를 포장했다. 반면 이 나무는 그보다 먼저 이곳에 자리 잡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가 나무를 보호하는 것인지, 아니면 나무가 먼저 있던 공간에 들어온 인간의 행위를 이제야 돌아보는 것인지 질문하게 된다.
특히 나무 주변의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를 바라보면서 그런 생각은 더 강해졌다.
뿌리가 제대로 숨 쉬고 물을 공급받을 수 있는 환경이었을까.
우리는 나무에게 그런 질문을 한 적이 있었을까.

“나무 한 그루도 수많은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이번 워크숍이 던지는 문제의식도 여기에서 출발한다.
도시의 나무는 햇빛과 물, 토양과 미생물뿐 아니라 사람의 돌봄, 기술, 행정과 제도, 장소의 기억 등 수많은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현경 교수(생태신학자, 뉴욕 유니언신학대학원 명예교수)는 이날 예술과 생명의 관계에 대해 강한 문제를 제기했다.
김환기가 나뭇가지 하나가 꺾이는 것에도 괴로워했다는 이야기를 언급하며 “윤리가 없는 예술도 예술인가”, “어떤 예술도 생명 파괴는 안 된다”고 말했다. 실제 김환기는 수화(樹話)라는 호도 가지고 있다. 
또 이 나무가 지역 주민들에게 치유의 의미를 갖는 존재라고 강조하며, 인간의 편의를 위해 생명을 제거할 수 있는지를 물었다.
현 교수는 나무를 둘러싼 문제를 개인의 소유권만으로 볼 것이 아니라 공공성과 커먼스(commons)의 관점에서도 바라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잎은 타들어가고, 나무의 생사는 아직 모른다

최진우 박사는 현재 나무의 상태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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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나무의 밑동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상황은 더 선명해진다. 나무 줄기에 바짝 붙어 콘크리트와 아스팔트가 일부를 걷어냈음에도 아직 잔재가 남아있다. 나무가 뿌리를 내릴 수 있는 흙의 공간은 그만큼 제한돼 있다.
사건 이후 종로구청은 뿌리를 뒤덮었던 콘크리트, 아스팔트 일부를 제거하고, 시민단체는 안전펜스를 설치했다. 미술관 벽은 담쟁이넝쿨이 잘려나간 흔적이 확인되었는데 남아있는 뿌리에서 다시 담쟁이 잎이 나는 것도 확인됐다.
나무의 잎 상태도 심각하다.
최 박사는 지난 5월 전체의 약 90%가 변색·탈색된 것으로 판단된다고 설명했다. 이번 여름처럼 비가 많이 오지 않은 상태에서 이어진 폭염으로 수분이 부족했고, 잎 끝부분이 타들어간 흔적도 관찰됐다는 것이다.
현재 남아 있는 잎은 전체의 약 25% 정도로 보인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나무의 생사를 단정할 수는 없다.
나무가 회복하더라도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의 설명이다.
나무의 시간은 인간의 시간과 다르다.
사람에게 한 계절은 짧지만 나무에게 회복은 몇 년의 시간이 될 수도 있다.

왜 지금 이 나무가 중요한가

현장에서 가장 오래 머릿속을 떠나지 않은 것은 오히려 이 나무의 평범함이었다.
가을이면 은행잎이 떨어질 것이다.
누군가는 그 잎을 쓸어야 한다. 낙엽은 사람에게 수고로움을 준다. 뿌리가 도로를 밀어 올리면 도로를 관리하는 사람에게도 일이 생긴다.
도시는 그렇게 만들어진다. 불편한 것을 정리하고, 관리하고, 필요하면 제거한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이 나무 앞에서 멈춰 서서 묻고 있다.

돌보지 않는 나무인가.
아니면 우리가 돌보지 않은 나무인가.
불편하다는 이유로 생명을 제거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결국 나무에 관한 질문만은 아니다.
인간에게 편리한 도시를 만드는 과정에서 다른 생명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묻는 질문이다.

‘랭킹’이 아니라 ‘링킹’하는 도시

현 교수는 이날 경쟁과 서열을 의미하는 ‘랭킹(ranking)’이 아니라 연결을 의미하는 ‘링킹(linking)’의 사회를 이야기했다. 사람과 사람뿐 아니라 사람과 자연도 연결돼 있다는 것이다.
오래된 나무가 한 장소의 역사를 기억하는 증언자라는 이야기도 나왔다. 우리 사회에서 오래된 나무에 신령이 깃들었다고 믿었던 전통 역시 인간이 나무를 단순한 자원으로만 바라보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제시했다.

결국 이번 워크숍은 나무와 인간 중 누가 옳으냐를 결정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나무 한 그루를 둘러싸고 누가 연결돼 있는지, 누가 배제돼 있었는지, 어떤 관계가 보이지 않았는지를 찾아보는 자리였다.
참가자들은 나무를 대신해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나무와 주변의 관계를 조사하고 기록하는 사람이 됐다.

나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부암동의 가파른 골목길에서 다시 은행나무를 바라봤다.

금이 간 담벼락과 콘크리트, 아스팔트 사이에 서 있는 나무다. 화려하지도 않고 공원 한가운데 있는 나무도 아니다.
그저 그 자리에 있다. 어쩌면 우리는 이 나무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볼 수도 있다.
우리가 나무에 의미를 부여한 것이 아니라, 이제야 그 나무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
인간이 편리함을 위해 뿌리를 덮어버린 것은 무엇이었는지.
우리가 소유한다고 생각하는 공간에서 다른 생명은 어떤 권리를 가질 수 있는지.
그리고 다음 세대에게 어떤 도시를 남길 것인지.

이번 워크숍은 9월 14일 ‘행위자 소환과 번역하기’, 9월 21일 ‘관계의 재편과 지형도 그리기’로 이어진다.
은행나무 한 그루에서 시작된 질문이 어디까지 확장될지 지켜볼 일이다.
어쩌면 중요한 것은 나무 한 그루를 살리는 일이 아니라, 나무 한 그루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달라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김환기의 호는 수화(樹話)다. 나무 수(樹)에 말씀 화(話), 그대로 풀면 ‘나무와 이야기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부암동에서 마주한 은행나무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콘크리트와 아스팔트 사이에 뿌리를 내리고, 담벼락을 마주한 채 그저 그 자리에 서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나무를 대신해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동안 듣지 않았던 나무의 이야기를 들어보려는 것일까.

수화(樹話). 나무와 이야기한다는 이름을 가진 예술가의 미술관 앞에서, 우리는 비로소 한 그루의 나무와 대화하는 법을 묻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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