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용산공원에 주택공급을 하겠다는 구상은 서울시의 강력한 반발에 교착상태에 있다.
국토교통부장관과 서울시장은 두 차례 만나 용산공원 활용 방안을 논의했지만 입장 차이를 좁히지 못했다. 이제는 후임으로 인선될 국토부 장관에게 추진동력이 넘겨지고 있다.
핵심은 주택 공급과 녹지 보존 중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로 모인다.
그런데 여기서 조금 다른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도시의 녹지는 반드시 하나의 거대한 공원 형태로 존재해야 하는가.
거대한 공원 하나와 동네의 숲은 같은가
용산공원을 지키자는 주장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용산공원은 약 300만㎡에 이르는 대규모 공간으로, 서울 도심에 남은 대형 녹지라는 상징성과 미래 세대에 물려줄 국가공원이라는 의미가 있다. 현행 용산공원조성특별법 역시 용산기지 본체를 국가공원으로 조성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어 주거용도로 전환하려면 법적 절차도 필요하다.
따라서 용산공원을 보존하는 것은 중요한 도시정책적 가치가 있다.
하지만 대형 공원을 보존하는 것과 시민들의 일상적인 녹지 접근성을 높이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용산공원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사는 사람과 서울 외곽에 사는 사람에게 이 공원이 갖는 의미는 같지 않다.
공원이 아무리 크더라도 실제 이용을 위해 이동해야 한다면 그것은 일상적인 생활환경이라기보다 목적지를 찾아가는 여가공간에 가까울 수 있다.
반면 집을 나서 학교나 지하철역으로 가는 길에 나무가 있고, 동네 골목에 작은 정원이 있고, 버스를 기다리는 곳에 그늘이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것은 특별한 날 찾아가는 공원이 아니라 매일 접하는 생활환경이기 때문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서울에 녹지가 얼마나 많은가”뿐만 아니라 “내가 사는 곳에서 얼마나 쉽게 녹지를 만날 수 있는가”일 수 있다.
서울시가 꺼내든 ‘그늘보행권’
이런 관점에서 최근 서울시가 도시계획에 적용하기 시작한 ‘그늘보행권’은 주목할 만하다.
서울시는 9일 영등포구 도림동 133-1 일대 신속통합기획을 확정하면서 ‘그늘보행권’을 주요 계획 요소로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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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서울시 홈페이지 |
신안산선 도림사거리역 신설에 맞춰 역과 생활가로를 따라 가로숲공원을 배치하고, 시민들의 생활동선을 따라 그늘이 이어지도록 보행공간을 연결한다는 계획이다.
도림사거리역 인근에는 광장형 가로숲공원을 만들고, 보행량 증가가 예상되는 도신로변에도 가로숲공원을 조성한다.
서울시는 이를 통해 출근·등교와 대중교통 이용 등 일상적인 이동경로에 연속적인 그늘을 확보해 시민들이 폭염 속에서도 걷고, 기다리고,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겠다고 설명했다.
여기서 눈여겨볼 부분은 녹지를 목적지로 만들지 않고 이동경로에 심었다는 점이다.
공원에 가야만 나무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집에서 역까지 가는 길 자체가 녹색공간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GBC도 ‘도심 숲’을 도시 속으로 끌어들인다
비슷한 방향은 강남구 삼성동 현대차 GBC 개발계획에서도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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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서울시 홈페이지 |
서울시는 GBC 설계변경을 통해 영동대로 지상광장과 연결되는 약 1.1만㎡ 규모의 ‘도심 숲’을 조성하고, 저층부 옥상에도 약 1.3만㎡ 규모의 정원을 계획했다.
GBC와 영동대로 지상광장, 복합환승센터 지하를 연결해 보행과 녹지축을 구축하고, 도심 숲을 주변 공공보행공간과 문화시설과 연계한다는 구상이다.
옥상정원 역시 시민에게 개방하고 전용 엘리베이터 4기를 설치해 접근성을 높인다.
도림동이 생활권의 가로숲을 만드는 방식이라면 GBC는 대규모 개발사업 안에 도심 숲과 정원을 집어넣는 방식이다.
둘은 규모와 사업 성격은 다르지만 공통점이 있다.
녹지를 도시의 빈 공간에 남겨두는 것이 아니라 보행과 생활의 중심에 배치한다는 것이다.
‘정원도시’를 표방한다면 녹지의 양보다 접근성을 물어야 한다
서울시는 정원도시를 주요 도시정책 가운데 하나로 내세우고 있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도시계획에서 질문도 달라질 필요가 있다.
“공원이 몇 개 있는가.” “녹지 면적이 얼마나 늘었는가.” 여기에 더해
“시민은 집에서 몇 분 만에 녹지를 만날 수 있는가.” “학교까지 걷는 길에 그늘이 있는가.”
“지하철역까지 가는 동안 나무와 정원을 만날 수 있는가.” 를 물어야 한다.
이는 도시계획에서 상당히 중요한 변화다.
거대한 공원 하나를 조성하는 것만으로는 도시 전체의 녹지 접근성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반대로 작은 공원과 가로숲, 학교숲, 공개공지, 옥상정원 등을 촘촘하게 연결하면 도시 전체의 녹지 경험을 바꿀 수 있다.
용산공원 논쟁이 던지는 또 하나의 질문
그렇다고 이 논리가 “용산공원 대신 동네 숲을 만들면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용산공원처럼 서울 전체가 공유해야 할 대규모 녹지를 지키는 것과 생활권 곳곳에 녹지를 확충하는 것은 함께 추진할 수 있는 정책이다.
둘의 기능이 다르기 때문이다.
문제는 지금까지 도시의 녹지를 이야기할 때 ‘큰 공원을 확보했느냐’에 지나치게 초점을 맞춘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도시의 삶에서 일상의 동선에 나무와 숲과 정원이 들어오는 것이야말로 정원도시의 가장 현실적인 모습일 수 있다.
정원도시의 기준을 바꿔야 한다
서울의 정원도시 정책이 앞으로 한 단계 더 나아가려면 ‘녹지 총량’에서 ‘녹지 접근성’으로 평가 기준을 넓힐 필요가 있다.
우리가 원하는 미래의 서울은 거대한 공원 하나를 가진 도시인가.
아니면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나무를 만나고, 학교 가는 길에 그늘이 있고, 지하철역까지 숲길을 걸으며, 동네 어디에서든 잠시 쉬어갈 수 있는 도시인가.
서울의 미래 도시계획은 이 둘을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동시에 달성해야 할 목표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