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게차에 결박된 채 공장 바닥을 질질 끌려 다니는 한 스리랑카 출신 이주노동자의 영상이 전국을 충격에 빠뜨렸다. 이것이 2025년 한국 산업현장의 ‘현실’이라니, 누구도 쉽게 믿기 어려운 일이다. 대통령이 ‘야만적 인권침해’라고 규정하고, 고용노동부가 즉각 기획감독에 착수했지만, 많은 인권 활동가들과 노동 전문가들이 말한다. 이 사태는 단지 한 공장, 한 관리자, 한 순간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라고.
그 구조는 바로 고용허가제(E-9)다.
고용허가제(EPS: Employment Permit System)는 고용주가 국내 인력을 구하지 못할 경우 외국인 근로자를 합법적으로 고용할 수 있도록 정부가 허가하는 체계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내국인 고용기회 보호와 중소기업 등의 인력난 완화를 목적으로 2004년부터 이 제도를 시행했다. 기본 3년 체류 가능하고 이후 사용자 요청 시 최대 2년 연장 가능하다. 사업장 변경은 매우 제한적이며, 고용주의 동의 없이는 이직이 어려운 구조이다. 특별한 사유(폭행, 임금체불 등)가 있는 경우에도, 3개월 내에 새 직장을 못 구하면 불법체류 처리, 강제출국 대상이 된다. EPS 근로자도 한국 내국인과 동일하게 근로기준법, 최저임금법, 산업안전보건법 등의 적용 대상이다.
“왜 가만히 있었을까?”
사람들은 종종 이렇게 묻는다.
"왜 바로 신고하지 않았을까?"
"왜 그렇게까지 당하면서도 일을 계속했을까?"
그러나 이런 질문은 피해자의 용기 부족이 아니라, 제도적 갇힘(structural entrapment)을 무시한 순진한 물음이다.
고용허가제 하의 이주노동자는 원칙적으로 사업주 동의 없이는 이직할 수 없다. 사실상 ‘사장님의 허락’을 받아야만 새 일터로 옮길 수 있다는 뜻이다. 폭언이 일상이고, 물리적 학대까지 이어져도 쉽게 직장을 떠날 수 없다. 사장의 “노” 한 마디면, 그는 여전히 거기 있어야만 한다.
심지어 폭행 같은 예외적 사유로 이직이 허용된다고 해도, 3개월 내 새 일자리를 못 구하면 불법체류자가 되어 강제출국 대상이 된다. 그러니 이직은 자유가 아니라, 또 다른 모험이자 리스크다.
3년은 노예, 3개월은 덫
이주노동자들 사이에선 ‘3년은 노예’, ‘이직은 덫’이라는 말이 공공연하다. 고용주에게 밉보여 계약이 해지되면 새 직장을 구할 때까지 3개월의 시한부 인생이 시작된다. 이 시간 내에 새로운 고용처를 못 구하면, 돌아가야 한다.
고용주의 폭행이나 갑질이 발생해도 이들이 "참을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말을, 이번 사태는 우리 모두에게 너무도 선명하게 보여줬다. 피해 노동자가 괴롭힘을 견디다 못해 어렵게 시민단체에 도움을 요청한 뒤에야 사태가 드러났다는 점도 이 구조의 비극이다. ‘도움을 요청하는 것’ 자체가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이주노동자의 처지를 보여준다.
‘사장님 공화국’ 안에서 침묵하는 노동자들
지금의 고용허가제는 ‘인력 수급 안정’이라는 명분 아래, 노동자를 사장의 재산처럼 묶어두는 체계다.
ILO와 유엔이 여러 차례 비판했지만, 한국은 ‘산업계의 현실’을 이유로 바꾸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번 나주 벽돌공장 사태는 묻는다. 과연 이 구조는 계속해서 유지돼야 하는가?
외국인 노동자에게 이 사회는 정말 공정한가? 그들은 단지 ‘노동력’인가, 아니면 ‘인간’인가?
고용주가 여권을 빼앗고, 폭언을 일삼고, 노동자에게 폭행을 가해도 여전히 “사장님의 동의가 있어야 이직할 수 있는 나라”라면, 그것은 이주노동자에게 공정한 나라가 아니다.
제도부터 바꿔야 “다시는” 없다
정부는 이번 사태를 두고 “재발 방지”를 다짐한다. 대통령이 지시하고, 노동부가 움직인다. 그러나 ‘재발 방지’라는 말이 공허해지지 않으려면, 반드시 고용허가제의 구조부터 뜯어봐야 한다.
이직의 자유 보장, 권력 불균형 해소, 산업안전과 인권교육의 정기화, 불이익 없는 피해 신고 시스템은 이제 선택이 아니라 최소한의 조건이다.
이주노동자의 권리는 시혜가 아니라 권리다. 그 권리는 어떤 사업주의 동의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노동’의 정의를 다시 묻는다
대한민국은 더 이상 개발도상국이 아니다. 이주노동자가 우리 산업의 필수축이라는 사실도 모두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 ‘노동자’가 아닌 ‘노예’의 지위를 강요하는 나라라면, 우리는 그 어떤 선진국 지표를 내세워도 부끄러움을 피할 수 없다.
이주노동자는 ‘타자’가 아니다. 오늘, 누군가의 동료이고, 친구이며, 노동 현장의 구성원이다.
우리가 지금 외면하면, ‘다음 영상’은 머지않아 다시 도착할 것이다.
“왜 가만히 있었을까”라는 질문을 멈추고, 왜 가만히 있게 만들었는가를 묻자. 지금 우리가 고쳐야 할 것은, ‘사람’이 아니라 ‘제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