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는 여성 정치 참여가 역대 최고 수준으로 확대되는 성과를 거뒀지만, 여성을 출산과 돌봄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정책 기조와 낮은 정치적 대표성은 여전히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았다는 평가가 나왔다.
한국여성의정과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은 지난 6월 30일 국회의원회관에서 '정체된 여성 정치 대표성에 대한 해법은 무엇인가'를 주제로 지방선거 평가 토론회를 열고 여성 정치의 성과와 한계를 분석했다. 토론회에서는 여성 공천 확대와 정치인 육성 시스템 구축, 공천제도 개선이 시급하다는 의견이 공통적으로 제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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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론회를 앞두고 박영선 신임 한국여성의정 상임대표가 참석자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
여성 당선인 역대 최고…그러나 단체장은 여전히 낮아
이번 지방선거에서 여성 당선인은 전체의 33.1%로 지방선거 사상 가장 높은 비율을 기록했다. 특히 지방자치제 시행 이후 처음으로 여성 광역자치단체장이 탄생하면서 여성 정치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경기도지사 선거는 주요 후보가 모두 여성으로 경쟁하면서 '여성 후보'가 아닌 정책과 행정 능력을 중심으로 평가받는 선거라는 점에서 상징성이 컸다. 이는 여성 정치인이 광역행정 최고 책임자로 성장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사례로 평가된다.
하지만 이러한 성과가 여성 정치 전반의 구조적 개선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지적도 나온다.
광역단체장 후보 가운데 여성은 7.4%에 불과했고, 기초자치단체장 여성 당선인도 약 4%(9명) 수준에 머물렀다. 권한이 큰 선출직일수록 여성의 진입 장벽은 여전히 높다는 것이다.
김은경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토론회에서 "여성 당선인은 역대 최고를 기록했지만 광역·기초단체장과 지역구 선거에서는 여성 대표성이 여전히 낮다"며 정당의 여성 후보 추천 확대와 공천제도 개선, 여성 정치인 육성 시스템 구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여성 정책은 늘었지만 '돌봄'에 갇혔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여성 정책은 양적으로는 크게 증가했지만 내용은 여전히 출산과 돌봄 중심에 머물렀다.
양대 정당의 여성 관련 공약 가운데 출산·양육·돌봄 분야가 939건으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더불어민주당은 성평등 거버넌스 강화와 성별 임금격차 해소, 일·가정 양립, 젠더폭력 대응 등을 제시했고, 국민의힘은 24시간 긴급돌봄 체계 구축과 출산 지원, 디지털 성범죄 예방 등을 주요 정책으로 내세웠다.
반면 여성의 경제적 자립, 정치적 대표성 확대, 의사결정 참여 확대와 같은 구조적 성평등 정책은 상대적으로 부족했다.
토론회에서는 여성 정책이 여성을 독립적인 사회 구성원이 아니라 '돌봄의 주체'로만 바라보고 있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여성의 삶 전반을 아우르는 정책보다 저출생 대응 정책의 연장선에서 접근했다는 것이다.
여성의당 "대표성 확대 공약 유일"
이번 선거에서 여성의당은 다른 정당과 차별화된 여성 대표성 확대 공약을 제시했다.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한 유지혜 여성의당 대변인은 성평등 조직 구성과 여성 정치대표성 확대를 핵심 공약으로 내세웠으며, 선거 이후 열린 평가 토론회에도 참석해 여성 정치 확대 방안을 제안했다.
특히 양대 정당이 여성 대표성 확대를 위한 구체적인 공약을 사실상 제시하지 않은 것과 달리 여성의당은 여성의 경제활동과 안전, 정치 참여 확대 등을 독립적인 정책 영역으로 다뤘다는 점에서 차별성을 보였다.
2030 여성 유권자들의 정의당과 여성의당 지지율이 의미 있는 수준을 기록한 것도 정책 중심 투표가 확대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분석됐다.
진보당, 여성 공천 확대가 성과로 이어져
정당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성과를 낸 곳은 진보당이었다.
진보당은 전체 당선인 41명 가운데 여성이 25명으로 61%를 차지했다. 후보 공천 단계에서도 여성 비율이 59%를 기록했고, 지역구 당선자가 대부분을 차지하면서 여성 정치인의 경쟁력을 입증했다.
이는 당헌에 여성 공천 50% 이상을 명문화하고 여성 정치인을 지속적으로 발굴·교육해 온 결과라는 평가를 받는다.
단순한 비례대표 확대가 아니라 지역에서 활동해 온 여성 정치인이 지역구에서 직접 선택받았다는 점도 의미 있는 변화로 꼽힌다.
멕시코가 보여준 정치개혁의 힘
토론회에서는 해외 사례도 함께 소개됐다.
멕시코는 2019년 헌법 개정을 통해 모든 공직에서 남녀 동수를 원칙으로 하는 성평등 제도를 도입했고, 그 결과 여성 국회의원 비율이 OECD 최고 수준인 50%를 넘어섰다.
이 같은 제도적 기반 위에서 지난해 멕시코는 헌정 사상 최초의 여성 대통령인 클라우디아 셰인바움을 선출했다.
전문가들은 멕시코 사례가 단순히 여성 대통령 한 명을 배출한 것이 아니라, 정당 공천과 정치제도를 장기간 개혁한 결과라는 점에서 한국 정치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평가했다.
"대표성 확대는 민주주의의 문제"
박영선 한국여성의정 상임대표는 "이번 지방선거는 여성 당선인 비율이 역대 최고를 기록했지만 여성 정치대표성이 구조적으로 확대됐다고 보기에는 여전히 과제가 많다"며 "여성 대표성 확대는 특정 집단만의 문제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다양성과 지속가능성을 높이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김종숙 한국여성정책연구원장 역시 "이번 선거는 여성 정치의 가능성과 동시에 높은 장벽을 확인한 선거였다"며 "여성 정치 대표성을 높이기 위한 제도적 기반을 더욱 촘촘하게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여성 정치 확대를 위해서는 단순히 여성 후보 수를 늘리는 수준을 넘어 정당 공천 구조 개선, 정치자금 지원 확대, 여성 정치인 육성 시스템 구축 등 제도적 개혁이 병행돼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