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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효과] 사과의 미학

2026-05-26 13:01 | 입력 : 마포저널

“모든 책임은 내게 있다”는 말의 무게
이재용과 정용진, 두 재벌 총수의 사과가 갈린 이유

사과는 흥미로운 행위다.
고개를 숙인다고 모두 같은 사과가 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과는 위기를 잠재우고, 어떤 사과는 불씨를 더 키운다. 사람들은 사과의 문장보다 그 사과가 만들어진 맥락과 태도를 본다. 무엇을 인정했고, 무엇을 끝내 말하지 않았는지를 기억한다.

최근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정용진 신세계그룹 회장의 사과는 한국 사회에서 ‘사과의 미학’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두 사람 모두 “모든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대중의 반응은 극명하게 갈렸다.

“비바람은 내가 맞겠다”
조직 앞에 자신을 세운 이재용의 사과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마주한 위기는 노조 파업과 조직 갈등이었다. 그는 “비바람은 제가 맞겠다”고 했다. 핵심은 문장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을 조직 앞에 세웠다. 갈등의 당사자를 적으로 규정하지 않았고, 노조를 “한 가족”이라고 표현했다. 이후 경영진은 조건 없는 대화에 나섰다. 사과가 단순한 감정 표현이 아니라 문제 해결의 출발점이 된 셈이다.

중요한 건 완벽한 사람이냐가 아니다. 위기의 순간, 책임을 어디에 두느냐다. 이재용 회장의 사과는 적어도 책임을 자신 쪽으로 끌어당기는 방식이었다. 조직이 감당해야 할 충격을 자신이 흡수하려는 모습이 읽혔다.

극우 코드와 SNS 정치 놀이
정용진 사과가 설득력을 얻지 못한 이유

반면 정용진 신세계그룹 회장의 사과는 다른 평가를 받았다.

정 회장 역시 “모든 책임은 제게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작 사람들은 “그래서 무엇을 잘못했다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이번 논란은 단순한 마케팅 실수가 아니었다. 그동안 이어져 온 ‘멸공’ 발언과 SNS 정치 놀이, 극우 코드 소비, 역사 인식 논란이 누적된 결과라는 시선이 강했다. 그런데 사과문에는 그 맥락이 빠져 있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사과는 기술이 아니라 자기인식이다.

사람들은 완벽한 사람에게 사과를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행동이 어떤 사회적 의미를 가졌는지 이해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정용진 회장의 사과는 정치적 메시지와 역사적 상처를 소비해온 지난 행보와 선을 긋는 데 더 집중한 듯 보였다. 결국 “유체이탈 화법”, “면피성 사과”라는 비판이 따라붙었다.

특히 기업 총수의 SNS는 더 이상 개인 공간이 아니다. 수백만 소비자와 투자자, 직원의 이해관계가 얽힌 공적 플랫폼이다. 그런데 일부 재벌 총수들은 SNS를 권력의 놀이터처럼 사용해왔다. 정치인을 조롱하고, 특정 진영의 감정을 자극하고, 밈과 혐오의 경계에서 박수를 받는 행위들 말이다.

문제는 그런 ‘놀이’가 위기의 순간에는 기업 전체의 리스크가 된다는 점이다.

실제로 스타벅스 논란 이후 시장에서는 미국 본사의 브랜드 관리 압박과 콜옵션 가능성까지 거론됐다. 사과가 나온 배경 역시 도덕적 성찰보다 경영 리스크 관리에 가까웠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제 총수의 SNS는 개인 공간이 아니다
오너리스크가 기업 가치가 된 시대

두 사람의 차이는 단순히 개인 이미지 차원에서 끝나지 않는다. 이들이 움직이는 기업의 규모 자체가 한국 경제와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삼성전자 는 한국 수출과 반도체 산업, 주식시장 전체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기업이다. 삼성전자의 위기는 곧 한국 경제의 위기로 읽힐 정도다. 실제로 삼성전자 주가 흐름은 국민연금 수익률과 개인 투자자 자산, 협력업체 생태계까지 연결된다. 그래서 시장은 총수의 한마디, 한 번의 사과, 위기 대응 방식까지 민감하게 본다.

신세계그룹 역시 유통과 소비 시장에서 차지하는 영향력이 작지 않다. 특히 스타벅스 는 단순한 커피 브랜드가 아니라 한국 소비문화의 상징처럼 자리 잡은 플랫폼이다. 이런 상황에서 총수 개인의 정치적 행보와 SNS 발언이 브랜드 이미지와 충돌하기 시작하면, 그것은 개인 문제가 아니라 기업 가치의 문제가 된다.

과거에는 오너의 사생활과 기업을 어느 정도 분리해서 바라보려는 분위기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ESG 경영, 브랜드 윤리, 소비자 행동주의가 강화되면서 ‘오너 리스크’ 자체가 기업 경쟁력의 일부가 됐다. 특히 SNS 시대에는 총수 개인의 말과 행동이 실시간으로 기업 이미지에 직결된다.

예전에는 재벌 총수의 돌출 발언이 “호탕한 스타일” 정도로 소비됐다면, 이제는 주가와 소비, 글로벌 계약 관계까지 흔드는 변수로 인식된다. 기업이 거대해질수록 오너 개인의 자유는 오히려 줄어드는 역설이 생긴 셈이다.

사과의 품격은 ‘낮은 자세’가 아니라 책임에서 나온다

사과의 본질은 결국 책임의 방향이다.
위로 향하는가, 아래로 향하는가.

좋은 사과는 책임을 자신에게 집중시키고 공동체를 보호한다. 나쁜 사과는 책임을 시스템과 실무진 뒤에 숨긴다. 좋은 사과는 왜 상처가 발생했는지 설명한다. 나쁜 사과는 “오해가 있었다”는 말만 반복한다.

한국 사회는 오랫동안 사과를 PR의 일부로 소비해왔다. 위기가 터지면 고개 숙이고, 눈물 흘리고, 몇 달 뒤 다시 같은 일이 반복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제 사과의 형식보다 구조를 본다. 누가 책임졌는지, 무엇이 바뀌는지, 그리고 그 사람이 정말 자신을 돌아봤는지를 본다.

사과에도 품격이 있다.
그 품격은 낮은 자세에서 나오지 않는다. 자기 책임을 끝까지 인정하는 용기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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