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가 2050년 탄소중립을 향해 나아가는 지금, 산업 전환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고 있다. 내연기관 자동차는 사라지고, 석탄화력발전소는 폐쇄되고 있다. 영국은 2024년 마지막 석탄화력발전소를 폐쇄했고, 프랑스는 2027년까지 전체를 폐쇄할 예정이다. 폴란드도 2040년까지 석탄화력발전을 중단하고 2049년까지 모든 석탄광산을 폐쇄하기로 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수많은 노동자와 지역사회가 고용 불안과 생계 위협에 직면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떠오른 개념이 바로 ‘정의로운 전환(Just Transition)’이다.
정의로운 전환,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나
정의로운 전환은 단순한 환경 정책이 아니다. 그 출발점은 1970~80년대 미국의 환경 재난 ‘러브 커낼(Love Canal)’ 사건이다. 산업 규제로 인해 생계를 잃은 노동자들이 “노동자를 위한 슈퍼펀드도 있어야 한다”고 외치면서 처음 등장했다. 이후 국제노동기구(ILO)와 유엔기후변화협약(COP)이 이 개념을 제도화하며, 정의로운 전환은 국제적 의제가 됐다.
2015년 파리협정은 정의로운 전환을 조약문에 명시했고, 2018년 폴란드 실레지아 선언, 2021년 유럽연합(EU)과 세계은행의 기금 창설로 본격화됐다. 최근에는 UN과 ILO가 ‘글로벌 액셀러레이터’를 출범시키며 개발도상국까지 지원 대상에 포함했다.
유럽과 미국, 정책·기금 동원하며 실천 가속
EU는 대표적인 선도 주자다. 2020년 발표한 ‘정의로운 전환 메커니즘’을 통해 2027년까지 1,000억 유로 이상을 산업 쇠퇴 지역에 지원한다. 단순한 보조금이 아니라 기업·노동자·지역주민이 참여한 계획서 제출이 필수다. 배정받은 예산의 50%가 삭감될 수 있는 조건까지 걸려 있어 실행력도 강력하다.
미국은 뒤늦게 뛰어들었다. 오바마 정부는 ‘파워 이니셔티브’를 통해 석탄 지역 경제를 살리려 했고, 바이든 행정부는 ‘저스티스40(Justice40)’ 정책으로 연방 기후예산의 40%를 소외 지역에 투자하고 있다. 특히 ‘기후·경제정의 선별 도구’를 개발해 예산이 실제로 필요한 곳에 도달하도록 설계했다.
한국, 법적 기반은 마련했지만… “이행은 부족”
한국도 움직이고 있다. 2021년 제정된 탄소중립·녹색성장 기본법은 ‘정의로운 전환’을 법적 용어로 채택하고, 지방정부의 책무를 명시했다. 2023년에는 ‘산업전환 고용안정법’이 통과돼 정부가 5년마다 산업전환 영향을 평가하고 고용대책을 수립하도록 규정했다.
하지만 문제는 ‘속도’와 ‘실행력’이다. 산업구조 변화에 따른 노동 전환 대책은 아직 시범사업 수준에 머무르고 있고, 내연기관이나 석탄 발전소 같은 고위험 업종 외에는 종합적 전략이 부족하다. 2023년 기준 정부 예산 중 탄소중립 전환을 위한 직무 훈련은 전체의 20%에 불과했고, 디지털 전환 대비에 더 많은 예산이 투입됐다.
지방정부도 예외는 아니다. 전국 광역자치단체 17곳 중 다수는 정의로운 전환 조례를 두고 있지만 실질적 예산 편성이나 사업 운영은 드물다. 광주시와 충청남도만이 전환 기금과 위원회를 별도로 운영 중이다.
전환은 이미 시작됐다… 지금 필요한 것은 “사회적 대화”
전문가들은 한국이 정의로운 전환의 개념은 빠르게 도입했지만, 정책 이행, 사회적 합의, 거버넌스 구축에서 여전히 갈 길이 멀다고 진단한다. 특히 이해관계자의 참여 없이 진행되는 전환은 불신을 키우고 인적 자산의 이탈로 이어질 수 있다.
국제 ESG 투자기관들은 이미 정의로운 전환을 기업의 주요 평가 지표로 삼고 있다. CA100+는 2022년 보고서에서 “조치를 취한 기업은 전체의 25%에 불과하다”며 탈탄소 이행보다 정의로운 전환 이행이 더디다고 비판했다.
기후위기 시대, 탈탄소 사회로의 전환은 피할 수 없는 흐름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기후위기의 해결을 위해, 다른 누군가는 생존을 위해 싸운다면 그 전환은 ‘정의롭지 않다’. 정의로운 전환은 ‘기후정의’를 사회적 현실로 끌어들이는 최소한의 장치다. 지금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예산이 아니라 더 많은 협의와 상호 신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