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부 탄핵 집회에서 우리는 새로운 정치문화를 목격했다. 2030 여성들이 중심이 된 평화적 집회는 기존 시위 문화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노래를 부르고 응원봉을 흔들며 민주주의를 자신의 삶으로 끌어들였던 그 풍경은, 한국 정치사가 이전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시민 참여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지금, 또 하나의 새로운 장면이 우리 앞에 펼쳐지고 있다.
올림픽공원 시위다.
많은 사람들은 이 시위를 '극우 시위'라고 규정한다. 극우 성향을 가진 집단이 참여하고 있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이 거대한 현상을 모두 설명할 수 있을까.
필자가 현장을 지켜보고, 참가자들이 모인 단체 대화방을 관찰하며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다'는 것이었다.
그곳에는 기존 보수도 있었고, 진보도 있었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어느 진영에도 자신을 속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오히려 이들은 극단적인 이념을 표방하는 사람들로부터 "당신들은 도대체 어느 편이냐"는 질문을 받기도 했다.
단체 대화방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화두 역시 특정 정당이나 특정 이념이 아니었다. 그들이 가장 많이 이야기하는 것은 자신들이 인식하는 참정권의 문제와 그에 대한 책임이었다.
그 인식이 사실과 일치하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그것은 증거와 제도를 통해 검증되어야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들이 스스로를 설명하는 언어는 '극우'가 아니라 '참정권'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필자는 올림픽공원 시위를 단순히 '극우'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규정하는 데에는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새로운 정치 현상이 나타날 때마다 익숙한 단어부터 찾는다. 보수와 진보, 좌파와 우파, 극우와 극좌. 그러나 현실은 언제나 그 분류보다 먼저 움직인다.
1987년 민주화 이후 한국 정치는 오랫동안 두 개의 축으로 설명되어 왔다. 하지만 오늘날 시민들의 정치 참여 방식은 점점 더 복합적으로 되고 있다. 정당에 대한 불신, 제도에 대한 회의, 세대적 경험의 차이,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한 정보 소비, 그리고 개인의 삶이 뒤섞이면서 기존의 정치학적 분류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움직임들이 나타나고 있다.
올림픽공원 시위도 그런 흐름 속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런데 정치권은 너무 빨리 결론을 내리고 있다.
6·3 지방선거 이후 양대 정당은 모두 2030세대의 표심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해석하고 있다. 자신들의 승리를 이야기하는 데는 적극적이지만, 정작 왜 청년들이 기존 정치에 거리감을 느끼는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답하지 못하고 있다.
최근 국민의힘 토론회에서는 한 교수가 인용한 통계가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해당 자료는 발표 당시부터 오류 가능성이 제기됐던 자료였다. 그럼에도 일부에서는 그것을 정치적 희망의 근거로 받아들이려 했다.
희망은 현실을 대신할 수 없다.
잘못된 자료는 잘못된 진단을 낳고, 잘못된 진단은 결국 잘못된 전략으로 이어진다. 이는 특정 정당만의 문제가 아니다. 민주당도, 국민의힘도 보고 싶은 민심만 본다면 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될 것이다.
정치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틀린 답이 아니다.
질문 자체를 잘못 던지는 것이다.
올림픽공원 시위가 극우인가 아닌가를 묻기 전에, 왜 기존 정치의 언어로 설명되지 않는 사람들이 광장에 모이고 있는지를 먼저 물어야 한다.
그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면, 이번 현상도 언젠가 또 다른 이름으로 반복될 것이다.
우리는 아직 올림픽공원 시위를 설명할 언어를 갖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 필요한 것은 낙인이 아니라 관찰이고, 희망 섞인 해석이 아니라 정확한 현실 진단이다.
새로운 시대는 언제나 기존의 언어보다 먼저 찾아온다.